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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서 ‘수벽치기’ 혹은 ‘육태안’으로 검색을 해보면 적지 않은 부정적인 내용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동안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일일이 대응하는 것 자체가 소모적인 일이고 대부분 음성적으로 떠도는 ‘뒷말’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무슨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보자.

(‘수벽치기’, ‘육태안’으로 검색하여 블로그, 카페 등에서 수집한 내용.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다)

  
   악의적이고 무책임한 말들이 어둠 속에서 쏜 화살처럼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우리가 대꾸를 하지 않자 무슨 약점이 있어서 그런 줄 알고 더욱 기승을 부렸다. 수벽치기 수련자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실 상대방을 공격하기로 마음 먹는다면 우리 쪽에서 할 말이 더 많은데, 겁도 없이 재잘대는 놈들을 그냥 놔둬야 합니까. 제자들은 답답한 마음이 컸다.

    우선 육태안 전인은 그런 종류의 인간들과 말을 섞는 자체를 불쾌하게 생각한다. 다른 무술을 평가할만한 자질-무술실력, 식견, 권위-을 갖추지 못한 개인이 제 생각을 끄적인 것에 대해 이 쪽에서 ‘공식적으로’ 변론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을 뿐더러 불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를 깎아내리려고 마음 먹은 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그 태도를 고수할 것이므로 이미 ‘대화’의 영역에서 벗어났다고 봐야 한다. 정보를 제공하고 설명은 해줄 수 있겠으나 한번 굳어진 적대적인 마음을 돌려놓을 재주는 없는 것이다. 즉 대응을 하든 안하든 싫어할 놈들은 끝까지 싫어할테니 맥빠지는 정력낭비는 하지 말자.

    
맞대응을 하지 않았던 또 한가지 중요한 이유는, 안 그래도 협소한 전통무예 영역에서 서로 헐뜯는 것이 보기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호비방을 하다보면 결국 양쪽 다 그 끝이 좋을 수가 없는데, 아무리 인간들이 밉다 하여도 어렵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무예의 맥을 손상시키는 일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바에야 그냥 우리가 참고 삼키는 편이 낫다.  

    무예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수련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운동을 '제대로' 하는 것이지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데서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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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까지가 지금껏 우리가 고수해왔던 입장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여전히 유효한 생각들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우리가 ‘짖는 소리’에 답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동안 수벽치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음지의 독버섯처럼 퍼졌다. 너무 무신경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학자들마저도 그러한 부정적인 여론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인데, 그들에게 뭐라 할 일이 아닌 것이 시작점에서부터 부정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면 학문적 기술()을 함에 있어서도 충분히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1)  그건 우리의 책임이지 학자의 잘못은 아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 공유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오늘날에는 ‘뒷말’도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느꼈다. 출처가 불분명하고 지극히 사적인 의견이라도 그것이 여러 번 인용되고 재생산되어 비슷한 내용이 복수로 존재할 경우, 정론으로 고착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통탄할 일인지 몰라도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이 접근하는 사람들은 지배적인 의견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마련이다. 매일매일 인터넷을 순찰하며 우리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에 조목조목 반박글을 달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도 해본다. 

   이제부터라도 적극적으로 움직여야겠다. 제대로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수련을 열심히 하는 것 못지 않게 무예의 맥을 지켜나가는 데 일조하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라고 제껴둘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아가면서 뭇사람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보의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그 자체가 불쾌하고 기가 막히는 일이지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 해야만 한다.

   솔직히 좀 속상하기도 했지만 얼마전 독도문제를 지켜보면서 조금은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뉴욕타임즈와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광고’해야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답답함과 억울함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멀쩡한 국가의 영토도 저런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맞이하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의 상황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  
    

  나는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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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다루면서
개인적 견해와 감성이 중심이 되는 기행문이나 문학에서 시작된 '상상의 산물'이 어떻게 객관적 학문의 영역으로까지 침투되는 가를 보여주었다. 어떤 시대, 사회에서든지 당시의 인식과 사고의 한계를 짓는 틀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객관적,논리적 영역이 아닌 풍문이나 시적 표현들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강화될 수 있다. 상상 속에서 재구성된 대상은 실재(
)하는 대상과는 별개로 존재하게 되며 거기서 개개인의 
사유는 굴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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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뢰(雲中雷)
대표적인 다짐수 형. 후반부에는 마주치기의 다양한 형태가 등장한다.

2009년 11월. 용인대 시범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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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벽치기의 기법은 크게 '수벽팔세'와 '수벽팔법' 두 부분으로 나뉜다.
다음은 신한승 선생이 육태안에게 전수한 수벽치기의 내용이다. 

수 벽 팔 세

수 벽 팔 법

맨손검술

보편적 무술의 영역(拳法)

<날개겨누기>
①날개세우기(上)
②한날개내리기(中)
③두날개내리기(下)

<날개펴기>
④날개들기(上)
⑤날개내기(中)
⑥날개내리기(下)

⑦날개접기(꺾기)

⑧손뼉치기

①손바닥(수벽, 掌)
②줌
③손날
④반날
⑤고드기

⑥쏘기
⑦집기(찍기)
⑧잽이

 

*자료: 일간스포츠, <수벽치기 계보찾았다>, 87년 7월 11일. 
         기법을 언급한 부분을 확대. 빨간색 부분이 팔세, 파란색 부분이 팔법.

 
수벽팔법이 '주먹 지르고 발차는' 보편적 무술의 영역이라면
수벽팔세는 맨손검술이라는 아주 독특한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정말이지 '세계'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수벽팔세는 무예를 포함한
인간 몸 움직임에 있어서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벽팔세는 검 없이 맨손으로 검의 기운을 몸 안에 담는 수련방법이다. 수벽팔세는 곧 맨손검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치 서예에서 획을 그으면서 내적 수양을 도모하듯이 검기를 형상화한 동작을 통해 몸과 마음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데 그 목적이 있다. 수벽팔세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격․방어의 틀에 맞추어 해석할 경우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손날로 베거나 손끝으로 찌르는 식의 단순한 차원에서의 검술의 재현이 아닌, 세(勢)를 펼침으로써 그 안에 검의 기운을 담는 것이다.

먼저 동영상을 보자.


  (동영상: 검과 맨손검술, 09년 11월 5일 용인대 시범)

  
  첫 번째 영상은 그래도 비교적 검술과의 연계성이 잘 드러나는, 덜 추상화된 맨손검술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수벽치기에서는 검술부터가 이미 실전적 기능(베기, 찌르기)에서 한번쯤 발효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무기로서의 검이 아닌 수행 도구로서의 검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래서 검술이 아닌 검무라고 부른다.  


두번째 영상을 보자.
 

 (동영상: 백송형 벼르기)

 두번째 영상은 벼르기型이다. 벼르기형은 맨손검술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수벽치기의 대표적인 형이다. 여기서는 검술과의 연계성이 보일 듯 말 듯하다.

 


세번째 영상을 보자.
 

(동영상: 천둔형 天屯型 09년 11월 5일 용인대 시범)

  
  세 번째 영상은 천둔형(天屯型)으로, 육태안 전인이 ‘98 프랑스 아비뇽 세계연극제에서 시연한 바 있다. (그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다) 여기서부터는 검술과의 연계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형 전체를 놓고보면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막상 동작요소를 분석해보면 수벽팔세의 기본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결이 좀 예술적일 뿐.


 당시 공연을 기록한 프랑스 르몽드지의 기사를 보자.
  

 
빗속에서 춤을 추다 

  육태안은 무예를 춤으로써 풀어 보였다. 그는 음악과 무용의 나라인 한국에서 프랑스 아비뇽 세계연극제에 파견한 50인의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살아있는 국보급 무형문화재로서 한국의 전통음악과 무용에 있어 최고수준에 있는 사람들이다. 육태안은 자신의 첫 공연 때 비가 내리는 중에도 한국의 전통무예인 수벽치기를 공연하여 번개를 잠재웠다.                  -1998년 7월 16일 르몽드지 1면 기사

  아비뇽 세계연극제에서는 매년 한 국가를 지정하여 그 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을 초청한다. 98년은 한국의 해였고 이매방, 안숙선, 김덕수 등과 함께 무예가로서는 수벽치기 육태안 전인이 참가하였다.  

  기사 첫문장을 보면 ‘육태안은 무예를 춤으로 풀어 보였다’라고 쓰고 있는데, 사실 별다른 조정이 가해지지 않은 원형 그대로를 보였을 뿐이다
. 무술로서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는 수벽팔세가 예술의 나라 프랑스에서 비로소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 *** ***   *** *** ***   *** *** ***

  지금까지 수벽치기를 다룬 방영물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처음에는 점잖고 문화적인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위력시범으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수벽치기를 소개하는 영상에서 정작 그 핵심인 맨손검술이 주가 되지 못한다. PD들의 입장에서는 아마도 수벽팔세만으로는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술의 범주 안에서 수벽팔세는 이상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중요 기법들이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쉽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예로서의 수벽치기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난제이다. 

  수벽팔세의 실전적 효용성을 굳이 따지자면, 중심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하고 집중력을 향상시켜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기법을 좀 더 효율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수벽팔세의 기운이 몸 안에 배게 되면 무술 전반에 있어서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넓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즉각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맨손검술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종격투기 선수의 코치가 되었을 때 맨손검술을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예술인들에게는 수벽팔세가 주목을 받았다. 사심(?)이 없어서일까 오히려 무술인들 보다도 더 정확하게 수벽팔세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세계에 가깝게 접근하였다. 육태안 전인은 연극 작품에 많이 참여하였는데 그 이유는 액션장면에 무술동작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수벽팔세의 기운의 성격이 무대에서 배우들이 뿜어내야 할 에너지의 성격과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음악인들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건강 관리를 위한 체조로 시작됐지만 점차 동작 속에 담겨있는 음악적인 요소, 예술적 가치를 보고 그것을 몸으로 느끼려한 것이다. 

"워낙 몸을 안써봐서 그렇지, 수벽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예술인들이다."     
 육태안 전인의 말이다.
 
  수벽팔세의 가치를 단순한 투쟁기술의 영역에 가둬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의 내적 수행법으로서의 가치를 높이고 올바른 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내야 한다. 수벽팔세는 인류의 몸짓 문화에 있어서 최고의 성취이며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다함께 계승해나가자.      
 


오늘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위의 동작을 ‘손날로 이마쪼개기’로 보지 말자는 것이다.
동작의 명칭은 '날개세우기'이며,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줏대 벼르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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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둔(天屯, Avignon)

천둔은 '98 프랑스 아비뇽 세계연극제(한국주간)에서 시연되었던 수벽치기 형(型)입니다.
그래서 별칭이 Avignon(아비뇽) 입니다.

2009년 11월 5일
용인대 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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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al art that almost died
 Subyok chigi master tracked down secretive tradition to bring it into the light

 
 They may own a cutting-edge IT infrastructure, but Koreans are not known for their free and frank sharing of information: Ask any foreign investor about difficulties in the local business environment, and transparency is certain to be near the top of the list. But at least today's Korean corporations are beginning to understand that disclosure is in their best interests.

Consider, then, the frustrations experienced by a man who has made it his life’s work to delve into perhaps the most secretive aspect of Korea’s deeply conservative culture: traditional martial arts.

"Taekwondo and modern martial arts are normally very commercialized," says Yook Tae-ahn, today the sole active master of Korea’s oldest extant martial art, subyok chigi(literally, "striking or clapping with the hands;" also romanized as subyok), a practice first mentioned in the Koryosa, or "History of Goryeo," of 1147. "But the real, traditional systems were kept hidden from the outside world."

How secretive are these arts? Few know they even exist.

It was during the 1980s, in the midst of Korea’s economic boom, that Mr. Yook, then a hapkido student in his 30s, decided to search out the old, native martial arts rather than Korea's modem, Japanese-influenced styles. His recommendations came by word of mouth - "I would hear of a guy who did certain practices" - but when he traveled to meet the person in question, he often found the master had already died or was too sick or old to teach.

Those who did have a background were intense!y secretive. "These were not mystical masters on mountaintops; these were regular guys with regular jobs, but sometimes even their families did not know they practiced," Mr. Yook says. Such men would not teach an outsider.

Tradition of secrecy

Their closed doors had a long tradition. "In the Goryeo Dynasty, martial artists were respected persons," says Mr. Yook. "But when Goryeo was overthrown in 1392 and the Yi Dynasty established, martial artists were forced into the army or were looked down upon in favor of scholars."

He believes that it was during this dynasty, and later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1910-1945), that practitioners became so intensely secretive. "Martial artists were suppressed (by the rulers) during those eras; I believe some became assassins," he says.

 

 

 However, he states that the real damage to Korea’s home-grown martial traditions took place from the 1950s onwards.

"Many practitioners were killed during the Korean War, and after the war, they had no food, no money, and so could not practice." He also hints that from the 1960s to 1980s, the dominant organizations marketing Korea’s modern martial arts, both locally and internationally, deliberately suppressed the older styles.

By the late 1980s, his search for these lost arts had become dispiriting - until he met Shin Han-seung. Mr. Shin was one of the last two masters of taekyun, a traditional folk martial art.

"I wanted to learn taekkyun from him," says Mr. Yook, "but when I met him, he was researching subyok chigi. He wanted to pass on what he had learned."

Mr. Shin had tracked down a practitioner of that art, but he died in 1987, of cancer. All Mr. Yook was left with were some of Mr. Shin’s personal notes on subrok. Among these was a single sheet of A3-sized paper on which were scribbled a series of notes and sketches. Also on the sheet were names and contact details.

And at the bottom, a cryptic message: "Live like a grinding stone."

Mr. Yook traveled to the address mentioned in the notes, in the central Korean market form of Chungiu. He knocked on the door. It was opened by an older man.

As soon as he saw him, a strange shock of recognition hit Mr. Yook: "I just knew this man was a master."

He immediately requested instruction. The man flatly denied any knowledge of martial arts, and made to close the door. Mr. Yook begged entrance, telling him he had traveled far. The host grudgingly acquiesced, and the two sat down to drink tea.

As they drank, the man told Mr. Yook, "Life is like a stone bean curd bowl: When you are grinding bean curd, you must turn the pestle only one way. If you turn it the opposite way, it will splash up. Always go with the flow, the natural way."

The scrawl at the bottom of Mr. Shin’s notes made sudden sense. It was the first lesson. Mr. Yook had finally found his man.

Mr. Yook later returned to Chungiu with Mr. Shin’s notes. He asked the old man again if he had any martial arts knowledge. The man conceded, guardedly, that he might. After a series of meetings, the master at last admitted his skill and slowly began to reveal it.

He was, indeed, a master of subyok chigi. His nickname was "ll-dong."

Over the course of five years, Mr. Yook was initiated into subyok. It took him that long to learn the material on that one sheet he had inherited from Master Shin.

At ll-dong’s house, he was only once introduced to another practitioner of subyok, though he never learned his name. That man confided that ll-dong had other students, though he had never met them.

At the end of the five years, the master told Mr. Yook, "I have taught you everything. Don’t come again, not even to my funeral. I live on in the movements I have taught you."

Even so, Mr. Yook continued to visit, though he learned nothing more. His teacher still lives in Chungju, but is today not teaching at all, preferring to spend his time with his grandchildren.

"He was uneducated, and hence of a low social status," muses Mr. Yook. "I think that is why he did not make his knowledge public; he did not want people to look down on this art."

 

Art reborn

Mr. Yook now considers his life’s work to be the creation of a rational syllabus that will lead to a resurrection of the art.

The moves he demonstrates in his well-maintained southern Seoul training hall are fluid and rhythmic. No observer would confuse it with taekwondo or hapkido, though he says martial artists with previous experience are a step up in learning it.

He calls subyok "sword fighting without a sword," and extensive use is made of the stabbing hand. Unlike modem martial arts, kicks are kept generally low. There is a range of trips and throws, and short swords and sticks are also utilized.

Subyok’s warm-ups exercise the spine, and, uniquely, include a number of clapping movements, which Mr. Yook claims help in unifying body, mind and spirit. He has published books on the art’s health-giving side, and has also demonstrated subyok at festivals in Avignon, france; Amsterdam, Holland, and Brussels, Belgium.

"There are no set 1-2-3 form sequences in subyok," explains Mr. Hong Jun-eui, 37, a salaried man who came to the martial art after training in taekwondo and hapkido. "Nor are there forceful moves like taekwondo and karate; it is natural movement, and movement principle. But once you learn the principles, you can create 1,000 forms of your own."

Mr. Hong also says the art is culturally suited to Koreans, who will immediately recognize movements and rhythms from Korean dance.

Paradoxically, power is built into the softness. "Although we do not do hard, breaking exercises, I was surprised to find, after training I subyok, that I could hit the punching bag with greater force," says Mr. Hong.

Mr. Yook is not in favor of the trend toward no-holds-barred martial arts. Instead, he prefers to teach the artistic and healthful aspects.

"This art is not about fighting, it is about finding your central equilibrium," he says. "Sparring and fighting are parts of martial arts, but not the whole."

While he does not keep subyok secret, he does not take on beginners: Only those with extensive experience in other martial arts, as well as actors and dancers, are accepted for training. He says the art he took so much trouble to find and learn is profound.

"Martial arts cannot be sport," he says. "They are mankind’s pinnacle of achievement in the blending of physical culture and spirit."

 

by Andrew Salmon

 

  

 

 

 

 

거의 사라졌던 무술

수벽치기 달인, 빛을 보게 하기 위해 숨겨진 전통을 추적

 

한국인들은 첨단의 IT 인프라를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자유롭고도 솔직한 정보 공유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내의 사업 환경의 어려움에 대해 물어본다면, 투명성이 분명히 최고 순위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날의 한국 기업들은 그들의 최대 이익을 위해 투명성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면, 아마도 한국의 가장 보수적인 문화의 가장 비밀스런 일면일지도 모르는 것을 탐구하는 것을 그의 인생의 과업으로 삼은 남자가 경험한 좌절감에 대해 고찰해보라.

 

“태권도와 현대 무술들은 대개 매우 상업화되어있습니다,” 육태안씨의 말이다. 그는 1147년의 고려사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기술인, 오늘날 현존하는 한국의 가장 오래된 무술, 수벽치기(글자 그대로, “손으로 때리거나 박수를 치기”)의 유일한 현역 지도자이다. “하지만 진짜, 전통 체계들은 외부세계로부터 숨겨졌었죠.”

 

이러한 기예들은 얼마나 비밀스러울까? 대부분은 그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한국의 경제부흥기인, 1980년대, 육태안씨는 삼십대의 합기도 수련생이었는데, 한국의 현대적이고,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들보다는, 옛날의, 토속 무술을 찾을 결심을 하였다. 전해 듣는 얘기들 중, 어떤 특별한 무술이다 싶으면 귀를 기울이곤 했지만, 그가 문제의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 종종 그 달인이라는 사람이 이미 죽었거나 너무 병들었거나 너무 늙어서 가르칠 수 없음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너무나 비밀스러웠다. “이들은 산꼭대기에 있는 신비한 고수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일상적인 직업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때때로 그들의 가족들조차도 그들이 수련한 것을 몰랐죠,”육태안씨는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외부인들에게 가르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비밀주의의 전통

그들의 폐쇄적인 태도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고려 왕조에서, 무술가들은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죠,” 육태안씨는 말한다. “하지만 고려가 1392년에 망하고 이씨 왕조가 세워진 후, 무술가들은 군대에 갈 것을 강요받거나 학자들을 우대하느라 경시되었죠.”

 

그는 이 왕조 동안에, 그리고 후에 일제 강점기(1910-1945)에도 그러했기에, 수련자들이 그토록 심하게 비밀주의가 되었다고 믿는다. “무술가들은 (통치자들에 의해) 그 시기에 탄압받았죠; 일부는 암살자들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국내 무술 유산들에 대한 진정한 위협은 1950년대 이후에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많은 수련자들이 한국 전쟁 때 죽었고, 전후(戰後)에, 그들은 먹을 것도, 돈도 없어서 수련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또한 지배적인 단체들이,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한국의 현대 무술들을 국내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홍보하면서 고의적으로 옛날의 무술들을 탄압했다고 또한 귀띔한다.

 

1980년대까지, 이러한 잃어버린 무술들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낙담의 연속이었다 - 신한승 선생을 만날 때까지는. 신한승 선생은 전통민속무예, 택견의 돌아가신 두 달인 중의 한 명이었다.

 

“그분에게서 택견을 배우길 원했죠,” 육태안씨는 말한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뵈었을 때는, 그는 수벽치기를 연구하고 계셨어요. 그분은 그가 터득한 것을 전수하고 싶어하셨죠.”

 

신한승은 수벽치기의 수련자를 찾아내려 해 왔었지만, 1987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육태안씨에게 남겨진 것은 신한승 선생이 수벽에 대해 남긴 개인적인 정리노트들 약간이었다. 그 정리본들 중에서 몇 장의 A3용지에 일련의 정리와 삽화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그 종이에는 명칭들과 겨루기의 세부 사항들도 있었다.

 

그리고 아랫부분에는, 불가해(不可解)한 말이 있었다: “숫돌처럼 살아라.”

 

육태안씨는 노트에 언급된 주소로 갔는데, 충주(Chungju)에 있는 한국식 중앙재래시장이었다. 그는 문을 두들겼다. 한 나이 지긋한 사람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를 보자마자, 이상스런 인식이 육태안씨를 강타했다: “난 그 사람이 달인임을 알았죠.”

 

그는 즉시 가르침을 청했다. 그 남자는 무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며 거절했고, 문을 닫으려 했다. 육태안씨는 먼 여행을 했다고 말하며 들여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주인은 마지못해 그렇게 했고, 그 둘은 앉아서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며, 그 남자는 육태안씨에게 말했다, “삶이란 것은 두부를 만들려고 콩을 가는 맷돌과 같은 것입니다: 콩을 갈고 있을 때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그것을 돌려야만 하죠. 당신이 그걸 반대방향으로 돌린다면, 콩이 튀어 나올 겁니다. 자연의 방식, 흐름과 항상 같이 가도록 하세요.”

 

신한승 선생의 노트 아래에 있던 낙서가 갑작스레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이 첫 수업이었다. 육태안씨는 마침내 그가 원하던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육태안씨는 이후 신한승 선생의 노트를 들고 충주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에게 그가 무술에 대해 알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 남자는 조심스럽게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일련의 만남 이후, 그 달인은 마침내 자신의 무술을 인정했고 차츰 공개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수벽치기의 달인이었다. 그의 별명은 “일동”. 5년 이상의 수업을 통해, 육태안씨는 수벽을 전수받았다. 신한승 선생으로부터 물려받았었던 종이 한 장에 있는 내용을 배우는 데 그토록 오래 걸린 것이다.

 

일동의 집에서, 그는 딱 한 번 또 한 명의 수벽 수련자를 소개받았었지만, 이름은 끝내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는 일동에게 다른 제자들이 있었음을 털어놓았다. 비록 그들을 만난 적은 없다고 했지만.

 

5년이 끝나갈 무렵, 그 달인은 육태안씨에게 말했다, “난 자네에게 모든 걸 가르쳤다고 생각해왔어. 다시는 오지 말고, 내 장례식에도 절대 오지 말게. 난 자네에게 가르쳐준 움직임들 속에 살아 있다네.”

 

그렇다 해도, 육태안씨는 계속 방문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스승은 충주에 계속 살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있으며, 그의 손자와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긴다.

 

“그는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사회적 지위가 낮습니다,” 육태안씨는 옛 추억에 잠겼다. “저는 그것 때문에 그 분께서 자신의 배움을 공개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은 사람들이 이 무술을 천시하길 원하지 않으신 거죠.”

 

 

부활한 무술

육태안씨는 지금 그의 일생의 사업은 이 무술의 부활을 이끌어 나아갈 합리적 체계의 완성이라고 여긴다.

 

잘 관리된 서울 남쪽의 도장에서 그가 시범하는 동작들은 흐르는 듯 하고 박자감이 있다. 어떤 누구도 그것을 태권도나 합기도와 혼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이전에 다른 무술을 배운 경험이 있는 무술가들이 그것을 배우는데 훨씬 더 빠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는 수벽을 “칼을 쓰지 않는 칼싸움,”이라고 부르며, 광범위한 응용은 손뼉치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현대의 무술들과는 달리, 발차기는 대개 낮게 한다. 딴죽과 던지기 종류가 있고, 짧은 칼과 막대기도 사용된다.

 

수벽의 몸 풀기 동작은 척추와, 독특하게도, 손뼉 치기 동작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육태안씨의 주장에 따르면, 몸, 마음, 그리고 정신의 통합을 돕는다고 한다. 그는 수벽치기의 건강적 측면에 대한 책을 저술해왔고, 또한 프랑스 아비뇽,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벨기에 브뤼셀의 축제에서 수벽을 시범해왔다.

 

“수벽치기에는 1-2-3같은 조직적인 형의 순서 같은 것이 없습니다,” 태권도와 합기도를 수련한 후 수벽치기를 배우러 온, 37살의 직장인, 홍준의씨는 말한다. “그리고 태권도와 가라데처럼 격렬한 동작도 없어요; 그건 자연스런 동작, 움직임의 원리죠. 그러나 그 원리들을 터득하기만 하면, 당신은 스스로 1,000가지의 형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홍준의씨는 또한 수벽은 문화적으로 한국인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한국인들은 한국 전통무용에서 나온 움직임과 박자를 즉각 알아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순적이게도, 힘은 부드러움 속에 있다. “억지로 힘을 들여서 격파 연습 같은 걸 하지 않음에도, 수벽을 수련한 후, 더 강한 위력으로 펀칭백을 타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놀랐었죠,” 홍준의씨는 말한다.

 

육태안씨는 무규칙의(no-holds-barred) 무술들로 기우는 유행에 대해 비호의적이다. 대신, 그는 예술적이고도 건강에 유용한 측면들을 가르치기를 선호한다.

 

“이 무술은 격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내적 평형을 찾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말한다. “대련과 격투는 무술의 부분이지, 전체가 아닙니다.”

 

그는 수벽을 비밀로 하지 않지만, 초보자들을 받지는 않는다: 다른 무술들에 광범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을 받아들이며, 배우들이나 무용수들도 그러하다. 찾아내어 배우는 데에 너무나 많은 고난이 있었던 이 무술은 무척 심오한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무술은 스포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말한다. “그것은 육체 문화와 정신의 혼합에 있어 인류 최고의 성취입니다(They are mankind’s pinnacle of achievement in the blending of physical culture and spirit.).”

by Andrew Sal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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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88년 5월 26일자 지평선 예용해>

 수벽치기라고 하면 이 토박이 우리말의 뜻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분은 극히 드물 것으로 생각된다. 수벽치기는 이미 국가에 의해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는 태껸과 더불어 우리 고유의 무예로서 쌍벽을 이루는 것이었으나 근자 그 전승이 인멸된 것으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일찍이 「고려사」나「조선왕조실록」또는 기타의 고문헌들에 드물게 수박(手搏), 수박(手拍), 수벽(手癖) 등으로 보이는 것이 수벽치기의 한자표기로서 그 비롯이 오래인 것은 추측할 수 가 있어도 어느 때부터라고 찍어 말하기는 어렵고 그 기법을 구체적으로 밝힌 자료도 없어서 뜻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게 여기던 터였다. 그러던 것이 뜻밖에 자매지 일간스포트의 주최로 25일 하오 한국일보 강당에서 젊은 수벽치기 전수자인 육태안 씨(陸泰安 35)에 의해서 일반에게 선보여졌다. 태껸이 발질을 주로 하는 무예인데 반하여 수벽치기는 손을 주로 쓰는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가 있으나 모든 동작이 3박자의 호흡으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특히 수벽치기가 여느 무예와 다른 점은 여느 무예는 살법(殺法)이 승하고 따라서 동작과 마음에 맺힘이 따르는데 수벽치기느 살기와 맺힘을 풀고 활법(活法)으로 밝음과 부드러움에 바탕을 두고자 하는 것에서 진면목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수벽치기의 수련은 기법의 수련보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보다 중히 여긴다. 지금토록 남의 앞에 나서기를 마다고 또 남의 눈에 띄기를 꺼리어 그늘에서 그늘로 은밀히 스승에서 제자로 구전심수되며 잠류해 왔던 전승무예가 오랜 차일을 벗고 백일하에 그모습을 드러낸 이상 보다 일반화 되어 다시는 전승의 인멸을 근심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강력사건이 속출하고 살상이 다반사가 된 세태 속에서 수벽치기의 활법이 제각기의 호신무예로 또 그 지닌 바 활법으로 세상을 밝게 하는 데 일조할 수도 있을 것같아 앞으로의 발전을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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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벽치기』고유무술 계보 찾았다

  무형문화재 76호인 택견과 쌍벽을 이루는 우리 고유무술로 기록에는 남아있으나 현대에 이르러 인멸된 것으로 여겨져오던

수벽치기가 재현될 것같다. 지난 2일 별세한 택견 인간문화재 신한승(辛漢承)씨가 그 계보를 추적, 발굴해낸 것, 신씨는 수벽의 체계를

미처 다 세우지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이 대업을 이어달라는 간절한 부탁을 그간 수벽을 전수해온 제자 육태안(陸泰安.35)씨에게

유언으로 남겼다.

택견이 발위주임에 비해 손쓰기가 현묘한 것으로 알려진 수벽치기는 수박(手搏.手拍)이란 이름으로 몇몇 문헌에 보이며

『해동죽지』엔 수벽(手擗)이란 조항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옛풍속에 손기술이 있으니 옛날 검기술로부터 온 것이다. 대좌하여 서로 양손으로 쳐서 오가는데 만약 한수라도 법에 어긋나면

  문득 타도되니 이름하여 수벽치기라 부른다. 검술은 먼저 손재주의 묘함으로부터 온다』

수벽 또는 수박등으로 표기에 혼란이 있는 것은 그 본래 명칭이 순수한 우리말인 것을 한자의 음을 빌어 적은 까닭으로 풀이된다.

신씨는 택견정립을 끝내면서부터 10여년간 줄곧 수벽찾기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별세 얼마전 기자가 찾아갔을 때 『우리 고유무예중 씨름과 활은 이미 정립돼 있고 택견도 마쳤으니 수벽만 하면 나의 일은 끝난다.

지옥엘 가더라도 수벽치기를 완성하고 싶다』라고 말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산(礪山)군 풍속조항에는 『군북쪽 12리 충청도 은진과의 경계에선 7월15일마다 근처의 양도(兩道)주민들이 모여

수박희(手搏戱)를 해 승부를 다투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기록과 전에 수벽치기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토대로 인맥을 추적해간

신씨는 수벽치기가 북한엔 없으며 남한에 충북.강원계와 전라.충남계의 두맥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막상 어렵게 인맥을 엮으면, 뒤받쳐줄 기록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고 얘기했다. 계보가 없더라도 일단 자료를 수집해 두라는

문화재관계자들의 조언으로 술기(術技)를 모은 끝에 얻어진 것이 안태도(安太道)씨에서 김일동(金日東)씨로 이어지는 수벽치기.

신씨가 발굴한 것에 따르면 수벽치기는 앉아서 하는 것과 서서하는 것으로 크게 나뉜다. 앉아서 하는 것은 비오는 날 봉롯방에서

내기삼아 겨루는 것이라 잡기.차기등의 동작은 쓸수없어 제한이 많다.

수벽치기의 진수는 역시 서서 하는 것인데

▲울력걸음 ▲자진걸음 ▲발뿌리걸음 ▲뒤꿈치걸음 ▲황새다리걸음등의 걸음새(발기본동작)가 있고

▲발끌어딛기 ▲제자리발바꿈질 ▲가새다리짚고 틀어돌기도 발기술에 속한다.

수벽치기에선 손을 『날개』라 부르는데 기본은 날개세우기. 손동작인 날개짓은

▲날개펴기 ▲날개꺽기 ▲날개들기 ▲날개내기 ▲한날개 내리기 ▲두날개 내리기등으로 구성된다

공격때 손을 사용하는 것은 ▲고드기(손끝) ▲손뼉(수벽.손바닥) ▲손날(손칼모양) ▲반날(손날의반대쪽) ▲주먹질 ▲쏘기(찌르는 것)

▲집기(손가락으로 급소를 집는 것) ▲잽이(잡는법)등이 있고 잽이에는 다시 ▲바깥잽이 ▲눌러잽이 ▲끌어잽이 ▲돌려잽이등

세분된 기법이 있다.

수벽에서 꼽는 급소는 어깨 위쪽으로 8군데와, 몸통 5군데. 발질법도 있는데 배꼽아래로 낮게 찬다

수벽치기의 특징은 검술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연습때 부채나 빗자루를 사용한다는 것도 검과의 관련을 시사해준다.

중국에서도 배워갔다는 우리검술은 기술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고증이 안되고 있는 형편인데 신씨는 『수벽치기를 잘 이용하면

검법도 나올듯하다』고 기대하기도 했었다.

신씨의 수벽치기 발굴에 대해 택견의 문화재지정에 관여했던 예용해(芮庸海)문화재 위원은『그냥 놔두면 없어져버리고 말것이므로

진짜 수벽치기라는 것이 인정되면 문화재지정, 또는 다른 방법등으로 이를 보호하는 국가적 조치가 있어야 할것이다』고 말했다.

 

<日刊스포츠 87年 7월月11일日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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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용해(芮庸海,1929.1.20~1995.4.10)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예용해 선생은 타계하기 전까지 문화재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라져가는 전통문화를 발굴,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는 최초로
인간문화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무형문화재의 보존과 전승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선생은 1973년, <무형문화재보고서-택견>을 작성하는 등
택견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 76호로 지정(1983년)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용해선생의 택견보고서, 1973년 4월)

 
  예용해 선생은 미지정 무형문화재인 수벽치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수벽치기에 관한 그의 언급을 보자.

 


가.《뿌리깊은 나무》 1977년 9월 호. 김명곤 기자.

---문화재 위원인 예용해씨는 수박희를 우리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에 동대문 근처에서 ‘수벽치기’를 한다는 노인 몇 분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하다고 한다.

  

나.《일간스포츠》1987년 7월 11일자. 예용해의 인터뷰 부분.

 ---예용해 문화재 위원은 ‘그냥 놔두면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므로 진짜 ‘수벽치기’라는 것이 인정되면 문화재 지정, 또는 다른 방법 등으로 이를 보호하는 국가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다. 1988년 5월 25일 ‘수벽치기’ 시연회의 안내책자에 예용해가
     직접 작성한 글

 ---택견과 유무상통하면서도 또 다른 수벽치기가 육태안씨에 의해서 전수가 확인되고 그 두터운 은밀의 장막을 걷고 여러 이목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은 우리 전통무예를 위한 성사로서 앞으로의 발전에 큰 기대를 걸게 된다.

  

 

<참고자료: 시연회 당시 예용해 선생의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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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나타나는 수벽치기의 역사

<<수벽치기맨손검술>> 지영사 발췌.

 

□역사

 

‘수벽치기’는 우리 고유의 전통무예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박희(手搏戱)’로 보이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수박(手拍)’.‘수박(手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수박(手搏)’으로, 《재물보(才物譜)》에는 ‘슈벽’,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수벽타(手癖打)’와 ‘수벽치기’로 나타나고 있어 그 전승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뼉치기로 빛과 소리를 발생시켜 몸 안팎의 어두움과 맺힌 곳을 풀어주고 제거해 몸과 마음을 밝게 해주는 수벽치기는 천(天).지(地).인(人의) 삼법과 음(陰).양(陽)의 조화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살법의 맺힘을 손뼉치기에서 생기는 밝은 기운으로 다스리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중요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된 택견과 더불어 우리 전통 무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수벽치기는 택견 인간문화재 신한승(辛漢承)에서 육태안(陸泰安)으로 전승되며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 수박과 ‘수벽치기’

‘수벽치기’라는 명칭은 1921년에 저술된 《해동죽지》에 나타난다. 이 책 〈수벽타(手癖打)〉조에는 “옛 풍속에 수술이 있는데, 옛날 검기로부터 나왔다. 지키면서 서로 양손이 오고 가는데, 만일 한 손이라도 법칙을 잃으면 곧 타도당한다. 이름을 ‘수벽치기’라고 한다(舊俗有手術 古自劍技而來 對坐相打兩手去來 如有一手失法則便打倒 名之曰수벽치기)”라고 기록이 있어 ‘수벽타’를 한글로 ‘수벽치기’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수벽치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표기하면서 ‘수벽’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수벽(手癖)’이라는 한자와 ‘치기’를 의미하는 ‘타(打)’를 빌려서 ‘수벽타’라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벽은 《재물보(才物譜)》에 기록된 ‘슈벽’이라는 용어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영이 1798년 편찬한 《재물보》에

“수박-지금의 ‘슈벽’과 같다. 마땅히 이 글자를 써야 한다(手搏-仝今之슈벽當用此字)”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벽과 슈벽은 동일한 발음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는 명칭이 수박〉슈벽〉수벽치기로 변화했음을 말해준다.‘수박’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사》를 보면 의종이 보현원에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면서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수벽치기’와 ‘슈벽’, ‘수박’이 동일한 표기임을 볼 때, ‘수벽치기’는 그 기원을 고려시대 ‘수박’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적어도 조선시대 들어서 사용된 수박(手拍.手搏)이라는 용어까지는 우리말을 한자로 차자(借字)한 것으로 조선 초기인 태종 10년과 세종 13년 기록에는 ‘수박(手拍)’이라는 용어가, 그 밖의 기록에는 ‘수박(手搏)’이라는 두 가지 한자표기가 동시에 나타난다. 1527년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교과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수(手)’는 ‘슈’로, ‘박(拍)’은 (.+l+ㄱ)으로 발음이 됨을 볼 수 있다. 이는 박이 으로 소리가 났으며, 수박은 우리말에 가깝게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조선 초기에 ‘수박(手拍·手搏)’이라는 용어가 이미 우리말화 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수백(手拍)은 우리말 발음에 가까운 것을, 수박(手搏)은 문헌에 내려오던 것을 계속 사용한 데서 두 표기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조선 초기의 ‘수박(手拍.手搏)’이라는 용어는 한자어를 빌어서 사용한 것이 아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수벽치기’에 남아 있는 용어를 통해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수벽치기’에서는 손끝을 가리키는 용어로 ‘고드기’라는 단어가 있다. ‘고드기’는 ‘손끝'이라고 하는데,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안쪽으로 세게 구부림으로써 둘째.셋째.넷째 손가락의 힘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세 손가락의 힘이 합쳐져 가운데 손가락에 모이며 칼끝에 비유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옛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단어이다. 물론 옛 문헌에 발견할 수 없는 단어인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고드기’라는 단어는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사전류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국어 사전류에는 ‘고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어들이 보인다. ‘고드름’과 ‘고드러지다’가 그것이다. ‘고드름’은 ‘낙숫물이 흘러내리다가 길고 뾰죡하게 얼어붙은 얼음[빙주(氷柱)]’을 말한다. 고드름의 17세기 문헌 표기는 ‘곳어름’이다. 곳어름은 ‘곳다’, ‘곧다’의 어근 ‘곳/곧(直)’에 얼음이 합성된 말로 발음이 변하여 고드름이 되었다. 제주 사투리 ‘곳아죽다[동사(凍死)]’에서 ‘곳다’와 추워서 손이 곱다는 표현에 나타나는 ‘곱다’의 어근과 ‘곳-’과 ‘곱-’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이는 ‘고드러지다’도 마찬가지다. ‘고드러지다’는 마르거나 굳어서 빳빳하게 된 모양을 뜻하는데, 곧게 언 모양으로 생각된다. 즉, 손을 빳빳하게 만드는 ‘고드기’의 모습과도 통한다.‘고드기’도 곳(곧)게 얼다라는 말에서 명사화 접미사 ‘-기’가 붙어 ‘곳(곧)얼기’가 되고 어떤 소리가 가까이 있는 다른 소리를 닮아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소리로 바뀌는 동화현상에 의해 ‘고드기’로 변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용어에 대해 경희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인 서정범은 15세기 이전에 쓰이던 고어가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를 사적인 자리에서 내 놓은 적이 있다. 이는 현재 전해지는 수벽치기가 조선 초기인 15세기경부터 전해졌다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된다. 15세기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고드기’의 존재는 수박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표기(手拍과 手搏)로 나타나는 조선 초기와 시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관련성을 더욱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는 현재 전수되고 있는 수벽치기가 적어도 조선초기부터 전수되던 맥의 흐름 하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계보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보이는 수벽치기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은 추정해 볼 수 있지만, 그 계보는 기록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그러나 《해동죽지》를 통해,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수벽치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점은 문화재위원이었고 택견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관여했던 고(故) 예용해(芮庸海)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문화재 위원인 예용해씨는 수박희를 우리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에 동대문 근처에서 ‘수벽치기’를 한다는 노인 몇 분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하다고 한다.

앞의 글은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영화배우 김명곤이 기자로 활동하던 《뿌리깊은 나무》 1977년 9월 호에 게재한 글이다. ‘수벽치기’ 전인 육태안이 ‘수벽치기’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던 시절보다도 한참 앞선 1977년의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수벽치기’라는 명칭이 전해져 왔으며, 무예 또한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예용해의 언급을 보자.

예용해 문화재 위원은 ‘그냥 놔두면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므로 진짜 ‘수벽치기’라는 것이 인정되면 문화재 지정, 또는 다른 방법 등으로 이를 보호하는 국가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앞의 글은 1987년 7월 11일자 《일간스포츠》에 실린 예용해의 인터뷰 부분이다. “진짜 수벽치기라는 것이 인정되면……”이라는 그의 말을 음미해보면, 그도 당시 신한승에 의해 전수가 확인된 ‘수벽치기’에 대해 자기가 예전에 봤던 수벽치기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해 1988년 5월 25일 ‘수벽치기’ 시연회의 안내책자에 예용해가 직접 작성한 글에서는

택견과 유무상통하면서도 또 다른 수벽치기가 육태안씨에 의해서 전수가 확인되고 그 두터운 은밀의 장막을 걷고 여러 이목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은 우리 전통무예를 위한 성사로서 앞으로의 발전에 큰 기대를 걸게된다.

라고 하고 있어, 신한승-육태안으로 이어지는 ‘수벽치기’를 자신이 봤던 ‘수벽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택견과 유무상통하면서도 또 다른 수벽치기”라는 구절은 ‘택견’과 ‘수벽치기’를 다른 무예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해주고, 신한승-육태안으로 전해오는 ‘수벽치기’를 예용해 자신이 봤던 수벽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육태안은 1987년 9월부터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택견.수벽’이라는 명칭으로 강좌를 열어 수벽치기를 보급하기 시작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벽치기의 유습

 

수벽치기는 손뼉치기 놀이 형태의 놀이로 어린아이들이 마주 앉아서 손바닥을 서로 치면서 노래를 하는 놀이의 형태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이 1895년에 편찬한 《한국의 놀이(Korean Games)》에 ‘수벽치기(SYOU-PYEK-TCHI-KI: HAND CLAPPING)’가 보인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그들 중 한 명이 실수하거나 질 때까지 주어진 순서대로 어떤 손동작을 동시에 취한다. 처음에 각각은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친 다음, 같은 방법으로 가슴을 친다. 그런 다음 손뼉을 치고, 쭉 뻗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친다. 그 다음 손뼉을 치고, 뻗친 오른손을 왼손으로 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손뼉을 치는 동작부터 시작해서 손뼉을 치고 끝나는 마지막 동작을, 두 사람이 처음에 한 대로 세 번 반복한다. 동작이 점점 빨라지면서 놀이는 매우 어려워진다. 전북 임실(任實) 필봉(筆峰) 농악과 경북 금릉(金陵) 빗내 농악에는 ‘수박치기’라는 무예적인 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 농악에서 하는 ‘수박치기’는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삼색 띠를 손에 잡고 좌우로 흔들며 어깨춤을 네 번 추고 양손으로 자기 무릎을 두 번 치고, 손뼉을 한 번 친다. 서로 오른손 손뼉을 몸 앞에서 맞댄 다음 자신의 손뼉을 한 번 친다. 그런 다음 서로 왼손 손뼉을 몸 앞에서 맞댄다. 마지막에는 서로 양손 손뼉을 몸 앞에서 두 번 맞댄다. 이러한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이 글에서는 필봉농악에서 손뼉을 맞댄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동작을 보면 상대방의 손바닥을 빠르게 타격에 가깝게 뻗는 것을 볼 수 있어 무예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이외에도 진도지방에 남아 있는 ‘강강술래’에서도 수벽치기의 유습을 살필 수 있다. 강강술래는 전라도 특히 남해안 일대에서 전승되고 있는 여성 집단원무로서 지금은 진도와 해남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강강술래를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강강수월래’의 손치기 부분을 보면,

손치기 손치기 손으로 친다고 손치기발치기 발치기 발로 친다고 발치기라는 노래와 움직임이 있는데, 움직임이 현재의 수벽치기의 가락수 가새치기나 촛대걸이 등의 움직임과 흡사한 부분이 있어 수벽치기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이외에도 조선말에 태어난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 1900~1994)의 구술(口述)도 수벽치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수박이란 손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타격을 방어하기 위해 연습하는 방법이다. 손은 주먹을 쥐는 것이 아니라 편 상태로 상대편 손 쪽으로 재빨리 뻗으며 상대방 역시 최대한 빨리 손을 내밀어 부딪치는 식으로 훈련한다. 흔히 곡조를 띤 소리를 질러가며, 박수도 쳐가며 행한다. 점혈법의 급소타에 대비한 훈련 방법이다. 두 사람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쳐가며 노는 놀이의 한 형태로서 민간에 전해 내려온다.라고 수박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 권태훈이 말하는 수벽타는 손위주의 무예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벽치기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 예들은 수벽치기라는 무예가 옛날부터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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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벽치기라는 명칭은 1921년에 저술된 《해동죽지》 에 나타난다.

이 책 〈수벽타(手癖打)〉조를 보면,

 

舊俗有手術 古自劍技而來 對坐相打兩手去來

如有一手失法則便打倒 名之曰 수벽치기



옛 풍속에 수술이 있는데, 옛날 검기로부터 나왔다.

지키면서 서로 양손이 오고 가는데, 만일 한 손이라도
법칙을 잃으면 곧 타도당한다. 이름을 ‘수벽치기’ 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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