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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벽치기 소개자료/1-3. 신문기사, 사진자료

문헌에 나타나는 수벽치기의 역사

by 줏대벼르기 2010. 6. 8.


문헌에 나타나는 수벽치기의 역사

<<수벽치기맨손검술>> 지영사 발췌.

 

□역사

 

‘수벽치기’는 우리 고유의 전통무예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박희(手搏戱)’로 보이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수박(手拍)’.‘수박(手搏)’,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도 ‘수박(手搏)’으로, 《재물보(才物譜)》에는 ‘슈벽’,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수벽타(手癖打)’와 ‘수벽치기’로 나타나고 있어 그 전승의 역사가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뼉치기로 빛과 소리를 발생시켜 몸 안팎의 어두움과 맺힌 곳을 풀어주고 제거해 몸과 마음을 밝게 해주는 수벽치기는 천(天).지(地).인(人의) 삼법과 음(陰).양(陽)의 조화로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을 바탕으로 하면서 살법의 맺힘을 손뼉치기에서 생기는 밝은 기운으로 다스리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중요무형문화재 76호로 지정된 택견과 더불어 우리 전통 무예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수벽치기는 택견 인간문화재 신한승(辛漢承)에서 육태안(陸泰安)으로 전승되며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 수박과 ‘수벽치기’

‘수벽치기’라는 명칭은 1921년에 저술된 《해동죽지》에 나타난다. 이 책 〈수벽타(手癖打)〉조에는 “옛 풍속에 수술이 있는데, 옛날 검기로부터 나왔다. 지키면서 서로 양손이 오고 가는데, 만일 한 손이라도 법칙을 잃으면 곧 타도당한다. 이름을 ‘수벽치기’라고 한다(舊俗有手術 古自劍技而來 對坐相打兩手去來 如有一手失法則便打倒 名之曰수벽치기)”라고 기록이 있어 ‘수벽타’를 한글로 ‘수벽치기’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수벽치기’라는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표기하면서 ‘수벽’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수벽(手癖)’이라는 한자와 ‘치기’를 의미하는 ‘타(打)’를 빌려서 ‘수벽타’라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벽은 《재물보(才物譜)》에 기록된 ‘슈벽’이라는 용어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영이 1798년 편찬한 《재물보》에

“수박-지금의 ‘슈벽’과 같다. 마땅히 이 글자를 써야 한다(手搏-仝今之슈벽當用此字)”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벽과 슈벽은 동일한 발음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는 명칭이 수박〉슈벽〉수벽치기로 변화했음을 말해준다.‘수박’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사》를 보면 의종이 보현원에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면서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수벽치기’와 ‘슈벽’, ‘수박’이 동일한 표기임을 볼 때, ‘수벽치기’는 그 기원을 고려시대 ‘수박’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적어도 조선시대 들어서 사용된 수박(手拍.手搏)이라는 용어까지는 우리말을 한자로 차자(借字)한 것으로 조선 초기인 태종 10년과 세종 13년 기록에는 ‘수박(手拍)’이라는 용어가, 그 밖의 기록에는 ‘수박(手搏)’이라는 두 가지 한자표기가 동시에 나타난다. 1527년 최세진(崔世珍)이 지은 한자교과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는 ‘수(手)’는 ‘슈’로, ‘박(拍)’은 (.+l+ㄱ)으로 발음이 됨을 볼 수 있다. 이는 박이 으로 소리가 났으며, 수박은 우리말에 가깝게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는 조선 초기에 ‘수박(手拍·手搏)’이라는 용어가 이미 우리말화 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수백(手拍)은 우리말 발음에 가까운 것을, 수박(手搏)은 문헌에 내려오던 것을 계속 사용한 데서 두 표기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조선 초기의 ‘수박(手拍.手搏)’이라는 용어는 한자어를 빌어서 사용한 것이 아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수벽치기’에 남아 있는 용어를 통해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수벽치기’에서는 손끝을 가리키는 용어로 ‘고드기’라는 단어가 있다. ‘고드기’는 ‘손끝'이라고 하는데,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안쪽으로 세게 구부림으로써 둘째.셋째.넷째 손가락의 힘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 세 손가락의 힘이 합쳐져 가운데 손가락에 모이며 칼끝에 비유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옛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단어이다. 물론 옛 문헌에 발견할 수 없는 단어인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고드기’라는 단어는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사전류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국어 사전류에는 ‘고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어들이 보인다. ‘고드름’과 ‘고드러지다’가 그것이다. ‘고드름’은 ‘낙숫물이 흘러내리다가 길고 뾰죡하게 얼어붙은 얼음[빙주(氷柱)]’을 말한다. 고드름의 17세기 문헌 표기는 ‘곳어름’이다. 곳어름은 ‘곳다’, ‘곧다’의 어근 ‘곳/곧(直)’에 얼음이 합성된 말로 발음이 변하여 고드름이 되었다. 제주 사투리 ‘곳아죽다[동사(凍死)]’에서 ‘곳다’와 추워서 손이 곱다는 표현에 나타나는 ‘곱다’의 어근과 ‘곳-’과 ‘곱-’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보인다. 이는 ‘고드러지다’도 마찬가지다. ‘고드러지다’는 마르거나 굳어서 빳빳하게 된 모양을 뜻하는데, 곧게 언 모양으로 생각된다. 즉, 손을 빳빳하게 만드는 ‘고드기’의 모습과도 통한다.‘고드기’도 곳(곧)게 얼다라는 말에서 명사화 접미사 ‘-기’가 붙어 ‘곳(곧)얼기’가 되고 어떤 소리가 가까이 있는 다른 소리를 닮아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소리로 바뀌는 동화현상에 의해 ‘고드기’로 변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 용어에 대해 경희대학교 국문과 명예교수인 서정범은 15세기 이전에 쓰이던 고어가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를 사적인 자리에서 내 놓은 적이 있다. 이는 현재 전해지는 수벽치기가 조선 초기인 15세기경부터 전해졌다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된다. 15세기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고드기’의 존재는 수박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표기(手拍과 手搏)로 나타나는 조선 초기와 시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관련성을 더욱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는 현재 전수되고 있는 수벽치기가 적어도 조선초기부터 전수되던 맥의 흐름 하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계보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보이는 수벽치기는 그 유래가 오래되었음은 추정해 볼 수 있지만, 그 계보는 기록의 부족으로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그러나 《해동죽지》를 통해,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수벽치기가 전해지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점은 문화재위원이었고 택견의 무형문화재 지정에 관여했던 고(故) 예용해(芮庸海)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문화재 위원인 예용해씨는 수박희를 우리말로 ‘수벽치기’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에 동대문 근처에서 ‘수벽치기’를 한다는 노인 몇 분을 만난 적이 있다면서, 그들의 말에 따르면 손을 주로 쓰는 기술인 듯하다고 한다.

앞의 글은 영화 〈서편제〉로 유명한 영화배우 김명곤이 기자로 활동하던 《뿌리깊은 나무》 1977년 9월 호에 게재한 글이다. ‘수벽치기’ 전인 육태안이 ‘수벽치기’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던 시절보다도 한참 앞선 1977년의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수벽치기’라는 명칭이 전해져 왔으며, 무예 또한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예용해의 언급을 보자.

예용해 문화재 위원은 ‘그냥 놔두면 없어져 버리고 말 것이므로 진짜 ‘수벽치기’라는 것이 인정되면 문화재 지정, 또는 다른 방법 등으로 이를 보호하는 국가적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앞의 글은 1987년 7월 11일자 《일간스포츠》에 실린 예용해의 인터뷰 부분이다. “진짜 수벽치기라는 것이 인정되면……”이라는 그의 말을 음미해보면, 그도 당시 신한승에 의해 전수가 확인된 ‘수벽치기’에 대해 자기가 예전에 봤던 수벽치기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음해 1988년 5월 25일 ‘수벽치기’ 시연회의 안내책자에 예용해가 직접 작성한 글에서는

택견과 유무상통하면서도 또 다른 수벽치기가 육태안씨에 의해서 전수가 확인되고 그 두터운 은밀의 장막을 걷고 여러 이목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은 우리 전통무예를 위한 성사로서 앞으로의 발전에 큰 기대를 걸게된다.

라고 하고 있어, 신한승-육태안으로 이어지는 ‘수벽치기’를 자신이 봤던 ‘수벽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택견과 유무상통하면서도 또 다른 수벽치기”라는 구절은 ‘택견’과 ‘수벽치기’를 다른 무예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게 해주고, 신한승-육태안으로 전해오는 ‘수벽치기’를 예용해 자신이 봤던 수벽치기와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육태안은 1987년 9월부터 《중앙일보》 문화센터에서 ‘택견.수벽’이라는 명칭으로 강좌를 열어 수벽치기를 보급하기 시작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벽치기의 유습

 

수벽치기는 손뼉치기 놀이 형태의 놀이로 어린아이들이 마주 앉아서 손바닥을 서로 치면서 노래를 하는 놀이의 형태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도 쉽게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스튜어트 컬린(Stewart Culin)이 1895년에 편찬한 《한국의 놀이(Korean Games)》에 ‘수벽치기(SYOU-PYEK-TCHI-KI: HAND CLAPPING)’가 보인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서 그들 중 한 명이 실수하거나 질 때까지 주어진 순서대로 어떤 손동작을 동시에 취한다. 처음에 각각은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친 다음, 같은 방법으로 가슴을 친다. 그런 다음 손뼉을 치고, 쭉 뻗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친다. 그 다음 손뼉을 치고, 뻗친 오른손을 왼손으로 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손뼉을 치는 동작부터 시작해서 손뼉을 치고 끝나는 마지막 동작을, 두 사람이 처음에 한 대로 세 번 반복한다. 동작이 점점 빨라지면서 놀이는 매우 어려워진다. 전북 임실(任實) 필봉(筆峰) 농악과 경북 금릉(金陵) 빗내 농악에는 ‘수박치기’라는 무예적인 춤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 농악에서 하는 ‘수박치기’는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삼색 띠를 손에 잡고 좌우로 흔들며 어깨춤을 네 번 추고 양손으로 자기 무릎을 두 번 치고, 손뼉을 한 번 친다. 서로 오른손 손뼉을 몸 앞에서 맞댄 다음 자신의 손뼉을 한 번 친다. 그런 다음 서로 왼손 손뼉을 몸 앞에서 맞댄다. 마지막에는 서로 양손 손뼉을 몸 앞에서 두 번 맞댄다. 이러한 동작을 계속 반복한다. 이 글에서는 필봉농악에서 손뼉을 맞댄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동작을 보면 상대방의 손바닥을 빠르게 타격에 가깝게 뻗는 것을 볼 수 있어 무예적인 모습을 살필 수 있다.이외에도 진도지방에 남아 있는 ‘강강술래’에서도 수벽치기의 유습을 살필 수 있다. 강강술래는 전라도 특히 남해안 일대에서 전승되고 있는 여성 집단원무로서 지금은 진도와 해남지방에 전승되고 있는 강강술래를 국가에서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강강수월래’의 손치기 부분을 보면,

손치기 손치기 손으로 친다고 손치기발치기 발치기 발로 친다고 발치기라는 노래와 움직임이 있는데, 움직임이 현재의 수벽치기의 가락수 가새치기나 촛대걸이 등의 움직임과 흡사한 부분이 있어 수벽치기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이외에도 조선말에 태어난 봉우(鳳宇) 권태훈(權泰勳, 1900~1994)의 구술(口述)도 수벽치기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수박이란 손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타격을 방어하기 위해 연습하는 방법이다. 손은 주먹을 쥐는 것이 아니라 편 상태로 상대편 손 쪽으로 재빨리 뻗으며 상대방 역시 최대한 빨리 손을 내밀어 부딪치는 식으로 훈련한다. 흔히 곡조를 띤 소리를 질러가며, 박수도 쳐가며 행한다. 점혈법의 급소타에 대비한 훈련 방법이다. 두 사람이 서로 손바닥을 부딪쳐가며 노는 놀이의 한 형태로서 민간에 전해 내려온다.라고 수박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데, 권태훈이 말하는 수벽타는 손위주의 무예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수벽치기를 말하는것으로 보인다. 이런 여러 예들은 수벽치기라는 무예가 옛날부터 존재했음을 말해준다.